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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소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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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날짜 2017-09-24
설교본문 누가복음 15:11-32
설교자 김영찬 목사

탕자의 회개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11-32)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서론

           여러분이 잘 아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하신 세가지 비유 중에 하나입니다. 잃어 버렸다가 찾은 한 드라크마의 비유, 잃었다 찾은 양의 비유와 함께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비유들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상황은 이러합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당시에 음식을 먹는다는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교제하고 어울린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자 당시의 구약 성경학자요 유대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하며 원망하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동일한 말씀을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고 하신 회개에 대해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회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돌아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아버지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그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유산을 다 탕진을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너무나 어렵게 됬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나라 사람 중 하나에게 부탁하여 돼지를 치면서 사람은 먹지 않고 주로 돼지의 사료로 주는 콩종류인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고 사람들이 돼지에게는 줘도 이 아들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너무나 허기진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아들은 아마도 자신이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불효와 그 귀한 유산을 허랑방탕한 생활을 통해 탕진한 것을 후회하고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후회와 반성(remorse or regret)을 회개(repent)라 부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다면 회개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 넘겼다는 것을 후회하고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책감에 빠져 자살을 했습니다(마태복음 27:1-5). 이런 후회와 반성과 자책감을 성경은 진정한 회개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후회와 반성의 오랜 시간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런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은 정식으로 인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죄의 자백 혹은 고백(confession or admit)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피고의 죄를 열거할 때 그 죄를 피고가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기도를 통해 눈물을 흘리며 죄를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이런 자백 혹은 고백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요한11:9).

           그런데 이런 자백과 고백의 수준을 아직 회개라고 하기에는 미흡합니다. 이 아들이 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리에만 머물렀다면 아직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결국 돌이켜서 돼지들과 함께 있던 그 비천한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일어 섭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마음의 반성이나 입술의 고백 정도라 아니라 삶에서 분명한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했던 것입니다(누가복음 3:8).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아직도 완전한 회개라고하기에는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 아들이 죄의 길에서 돌아서 나와서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고 다른 데로 갔다면 회개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예로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개의 완성은 아버지의 품에 완전히 안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는 회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라는 죄를 반성하거나 고백하거나 죄에서 돌아서는 그런 의미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의 문제 그 이상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서 가서 여럿 사람들을 만나고 왔는데 두 사람의 고민에 대해 듣고 왔습니다. 한 분은 목사님이고 한 분은 권사님입니다.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역을 잘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아들과 관계가 깨어져 아들이 집을 나가 혼자 생활을 합니다. 물론 사모님이 가서 아들을 가끔은 챙겨 주지면 이 아들은 아버지는 아직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목사님은 몹시 아들을 보고 싶어하고 찾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분 권사님은 딸과 사위 모두 와 관계가 깨어져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딸이 아예 연락도 끊고 종적도 감춰버렸습니다. 아무리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권사님은 한국에 있는 집으로 딸과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은 소송을 통해 중재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라도 딸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분들에게는 자녀들이 어떤 잘못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이며 필요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회개란 이런 것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멀어졌을 때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 하신 잃어 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로 표현한다면 주인의 손안에 들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앞에서 하신 또 다른 잃어 버렸다가 찾은 양의 비유로 표현한다면 목자의 어깨에 목마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과 주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십니까? 관계가 안녕하십니까(오갱끼데스까)? 부디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고 주님의 손에 들어가시고 주님의 어깨위에 올리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둘째로 회개의 시작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회개는 아버지의 부요하심과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회개에 대해 가장 많은 오해 중에 하나가 자신을 죄를 깨닫거나 반성하거나 정죄의식을 느낄때 회개를 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회개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탕자는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방황할 때, 그리고 돼지를 치며 허기진 배로 돼지의 사료를 먹으려고 애를 쓸 때,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조차 먹지 못하게 될 때에 아마 많이 후회하고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떨쳐 버리고 일어나 아버에게로 돌아갈 용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그가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됬을까요? 무슨 생각이 그를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이끌었을까요? 여기에 회개에 대한 중요한 키,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했고 18-19절에서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하고 일어나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회개로 이끄는 것은 정죄의식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수준입니다. 진정 회개로 이끄는 것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라고 하는 하나님의 부요하심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받아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깨달을 때에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망나니같이 말을 듣지 않고 살아가던 자녀가 나중에 어떤 특별한 계기를 통해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꾸짖고 때리고 저주를 해도 돌아오지 않던 사람이 사랑을 깨닫고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원수의 마음을 녹일 뿐 아니라 진정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시기 보다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 가슴을 찢고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고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깊이 이해한다면 회개는 우리의 인간의 반성과 후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넉넉하심과 사랑에서 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제가 강조하느냐 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하나님의 섭리를 제외시키고 인간의 의지와 결단으로만 이해하는 것처럼 회개를 하나님의 사랑을 제외시키고 인간의 어떤 의지와 결단으로만 이해하며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회개에 대한 세가지 비유에서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건이겠습니까? 형이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건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의 핵심은 아버지의 사랑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에 소극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다려 본 사람은 알 지만 기다림은 그 무엇을 하고 그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는 말이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떤 사람을 오래 기다리면서 느낀적이 있었습니다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는 매일 동구 밖에 나와서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아들이 돌아온 그 순간에 아버지는 마을 밖에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눈이 빠지라고 아들이 돌아오지나 않을까하고 매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아버지는 아직 아들이 멀리 있는데도 그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그 아들을 안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열열한 사랑이 있었기에 아들의 회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른 두 비유에서는 더 직접적입니다. 목자가 양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 목자는 그 양을 찾기 위해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를(99 마리) 위험하게도 들에 두고 찾도록 찾아 헤메입니다. 그리고 결국 찾아서는 너무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었을 때 (참고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라고 합니다.)  그것을 온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찾아서 또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서 잔치를 엽니다. 한 양과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동네 잔치를 연다는 말도 안되는 비유를 왜 주님께서 하셨을까요? 그 정도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그렇게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 비유에서 나타난 회개에 대한 교훈은 아버지의 열열한 기다림, 목자의 찾도록 찾아 다님, 한 여인의 찾도록 부지런히 찾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양이 회개하여 돌아왔습니까? 드라크마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까? 물론 아들은 사람이니까 회개하여 돌아왔지만 회개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이 핵심인 것입니다.

이 모든 비유의 내용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죄인의 회개를 열열히 기다리고 열열히 찾고 찾는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찾기 위해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의 시작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상한 사건이 마가복음 2장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온 사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환자에게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서기관들이참람하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속으로 의논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2:10).

           그 장면에서 이 중풍병자가 회개하는 장면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풍병자가 믿음이 있었다는 구절도 없습니다.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주님께서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주님께서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못 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주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찾아와 손을 내밀 때에 우리가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진정한 회개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부요하심, 그 하나님의 넓으심을 깊이 깨달을 때에 회개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시고 죄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고 주님의 손에 들어가시고 주님의 어깨에 올라 목마를 타시는 복된 성도님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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